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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대화

신앙 Q&A

논쟁에서 이기기보다, 질문하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생각하기 위한 안내입니다.

기독교를 향한 질문은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요. 질문마다 카드로 핵심을 먼저 보여 드리고, 자세히 보기를 열면 근거와 자주 나오는 반론, 정직한 한계, 함께 생각해 볼 질문까지 살펴볼 수 있어요.

설득을 목표로 하지만 증명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고, 어려운 질문에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증거, 도덕, 인생의 의미.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살펴봐요.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정말 있나요?

수학 문제처럼 딱 증명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생명이 가능한 아주 정교한 조건, 우리가 느끼는 선악의 기준, 채워지지 않는 의미에 대한 갈망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켜요. 여러 정황이 쌓이는 모습을 함께 살펴봐요.

수학처럼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정황이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주의 시작, 질서, 도덕, 의미에 대한 갈망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실험실에서 재듯 증명할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근거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역사가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처럼, 여러 증거가 한 방향으로 쌓이는지를 살피는 방식이 더 어울립니다.

첫째, 현재 주류 우주론은 우주가 약 1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시작이 있었다면 그 시작의 원인을 묻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우주의 물리 상수는 생명이 가능한 아주 좁은 범위에 놓여 있다고 많은 물리학자가 말합니다. 셋째, 우리는 인간이 존엄하고 잔혹함은 정말 악하다고 느낍니다. 넷째, 어떤 성취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의미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정황을 "증명"이라 부르기보다 가리킴으로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조된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알려진다고 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 정황들은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는 반론은 정당합니다. 예를 들어 미세 조정은 다중우주 가설로도 설명하려 합니다. 다만 다른 설명도 증명된 것은 아니므로,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는 증거를 비교하며 각자 판단하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개역한글)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정황들이 가리키는 분이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것까지 이 논증만으로 확정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로 이어집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증거"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올렸나요? 그 기준은 어떤 질문에 어울릴까요?

이어서 볼 질문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에요. 논증을 정확히 쓰면 "시작이 있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예요. 시작이 없이 스스로 계신 분에게는 이 말이 적용되지 않아요. 말장난이 아니라 논증의 범위를 따지는 문제라서, 왜 그런지 차근차근 풀어 볼게요.

"시작된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증은 시작이 없는 존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논증의 범위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가장 자주 나오는 반론 중 하나입니다. 논증을 다시 정확하게 쓰면 이렇습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우주는 시작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 이 논증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시간 이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처음부터 시작이 없는 분에게 "누가 시작하게 했는가"를 묻는 것은, 총각에게 아내의 이름을 묻는 것처럼 질문의 전제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원인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무한 소급은 설명을 영원히 미루는 것이라, 어딘가에는 스스로 있는 근원이 필요하다고 철학자들은 오래 논의해 왔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러면 우주가 시작 없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응답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빅뱅 우주론과 관측은 우주가 유한한 과거에 시작되었다는 쪽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우주론은 계속 연구되는 분야입니다.

말씀 속에서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0: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논증은 "스스로 있는 근원"이 있어야 함을 말할 뿐, 그 근원이 어떤 성품인지는 말하지 못합니다. 성품은 계시, 곧 성경과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다고 기독교는 고백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와 "시작이 있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이어서 볼 질문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무신론자도 착하게 사는데, 선악의 기준은 어디서 오나요?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선하게 살 수 있어요. 문제는 "선하게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선이 무엇인지 무엇이 보증하느냐"예요. 우리는 학살이나 아동 학대가 취향이 아니라 정말 악하다고 느끼는데, 그 직관의 뿌리를 함께 생각해 봐요.

무신론자도 얼마든지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질문은 "선하게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선이 무엇인지 무엇이 보증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인종 학살이나 아동 학대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악하다고 느낍니다. 그 직관이 단지 진화로 만들어진 생존 장치일 뿐이라면, 그것이 "옳다"는 보증은 어디서 나올까요? 이것이 도덕 논증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기독교는 선의 기준이 하나님의 성품에 닿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뀌는 여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도 잘못을 잘못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존엄하다는 말은 인권의 뿌리를 설명하는 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은 그 기준 앞에서 우리 모두가 부족하다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기준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종교 없이도 도덕을 세울 수 있다"는 반론은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신앙 없이도 윤리적으로 삽니다. 논점은 행동의 가능성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궁극적 근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입니다.

말씀 속에서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개역한글)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4-15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철학적으로 이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자·철학자도 있습니다. 한 가지 설득 경로로 소개하는 것이며, 이것만으로 신앙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이건 정말 잘못이야"라고 확신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 확신은 어디서 왔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신앙은 힘들 때 기대고 싶은 마음일 뿐 아닌가요?

프로이트는 신앙을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어요. 이 설명은 신앙이 왜 생겼는지 말해 줄 뿐, 참인지 거짓인지는 말하지 못해요. 위로가 된다고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고, 위로가 안 된다고 참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믿음이 위로가 될 수는 있지만, 어떤 믿음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 그 믿음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신앙을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마음의 투사, 곧 소원 성취로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은 신앙이 왜 생겼는지를 말할 뿐, 그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믿는 이유와 그것이 사실인지는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게다가 같은 논리는 무신론에도 적용됩니다. 심판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동기를 의심하는 것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고, 결국 증거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내용을 보면 "내가 바라는 대로 만든 종교"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자기 부인, 원수 사랑, 용서, 죄를 인정하는 것은 편한 소원과 거리가 멉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래도 믿고 싶어서 믿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마음의 필요가 믿음의 계기가 되는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계기와 근거는 다르며, 건강한 믿음은 근거를 계속 살펴보는 질문과 함께 자랍니다.

말씀 속에서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신앙이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로가 신앙의 전부이거나 신앙이 참이라는 이유는 아닙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믿음이든 "그걸 믿고 싶어서" 믿는 것과 "그게 사실이라서" 믿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인생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성공해도, 사랑받아도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껴요. 성경은 그 갈증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해요. 우연의 산물이라는 설명과 지음받은 존재라는 설명이 각각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하는지 함께 살펴봐요.

채워지지 않는 의미의 갈증은, 우리가 그 갈증을 채울 분을 향해 지어졌다는 단서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의 저자도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성공과 쾌락, 지식을 다 누려 본 사람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성경은 이 허무를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다룹니다.

세계를 우연과 물질의 산물로만 본다면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 됩니다. 이 입장에서도 사람은 얼마든지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다만 기독교는 의미가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의미를 "발견"하는 길로 소개됩니다. 가장 평범한 일상도 사랑과 섬김으로 이어질 때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이유를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의미는 내가 만들면 되지, 꼭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반론은 진지한 입장입니다. 다만 내가 만든 의미가 죽음과 고통 앞에서도 버틸 수 있는지는 각자 정직하게 따져 볼 만한 물음입니다.

말씀 속에서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도서 1:2-3 (개역한글)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8:3-4 (개역한글)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의미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글은 증명이 아니라 한 방향을 가리키는 단서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성취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래도 남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어서 볼 질문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요

하나님이 다 아신다면, 내 선택은 자유로운 건가요?

하나님이 미래를 아신다는 것과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말해요. 기독교 안에서도 이 둘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예요. 가장 널리 논의되는 설명들을 쉽게 풀어 볼게요.

알고 계신 것과 강요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두 가지를 모두 말하는 성경의 긴장을 정직하게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이 내일 일을 이미 아신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정해진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오래된 철학적 난제입니다. 먼저 구분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미리 안다는 것과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다는 것은 다릅니다. 날씨 변화를 아는 사람이 날씨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주권과, 사람이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진다는 사실을 둘 다 분명히 말합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해 기독교 전통 안에는 몇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입장, 사람의 자유를 더 강조하는 입장, 하나님이 시간 밖에서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보신다고 설명하는 입장입니다.

어느 입장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꼭두각시로 지으신 것이 아니고, 사랑은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선택은 실제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결국 어떤 설명도 완전하지 않다"는 반응은 맞는 말입니다. 철학자들도 합의하지 못한 문제이므로, 이 글은 한 가지 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말씀 속에서

19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개역한글)

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개역한글)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주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계속되는 영역이며, 한 문단의 답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교단마다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 일을 내가 강요한 것이 아닌 경우를 일상에서 떠올릴 수 있나요?

이어서 볼 질문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을까요

가장 아픈 질문이에요. 쉬운 답을 약속하지 않고, 정직하게 생각해 봐요.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을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은가요?

고난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성경도 아픔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탄식해요. 기독교는 고난을 멀리서 설명하는 대신 하나님이 그 자리로 들어오셨다고 말해요. 설명 이전에 곁에 머무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요.

고난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성경도 아픔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원인을 한 문장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깨어짐과 인간의 선택, 자연의 조건이 얽힌 현실을 인정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멀리서 설명하지 않고 그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아픈 사람에게 답을 강요하기보다 곁에 머물고 실제적인 도움을 찾는 일과 함께합니다.

성경에는 고난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욥은 이유를 끝내 다 알지 못했고, 시편 기자는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질문을 믿음 없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허락된 말로 다룹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고백은 하나님이 고난을 구경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직접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모두 설명받지는 못해도, 고난 속에 혼자 있지 않다는 약속이 신앙이 주는 가장 큰 위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씀 속에서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13:1-2 (개역한글)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3 (개역한글)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글은 고통을 겪는 분의 곁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지금 많이 힘들다면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먼저 구해 주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 가장 아픈 질문은 무엇인가요? 답을 듣고 싶은가요, 아니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가요?

이어서 볼 질문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을까요

전능하고 선하신 분이 왜 악을 내버려 두시나요?

철학에서 오래 다뤄 온 질문이에요. 사랑이 가능하려면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따라와요. 그리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 악을 멀리서 구경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셨다고 말해요.

사랑이 가능하려면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악의 가능성이 따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 악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악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 문제로 제기되곤 합니다.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존재를 지으셨고, 자유로운 존재가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 주장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음을 보였습니다. 오늘날 이 논리적 문제는 많은 철학자가 약화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더 어려운 것은 "이렇게 많고 깊은 악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증거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기독교는 설명을 완성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악을 멀리서 지켜보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악과 고통을 직접 맞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답은 이론이기 이전에 약속입니다. 악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으며, 눈물을 닦아 주시는 날이 온다는 약속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자유를 주시더라도 악의 정도는 줄이실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모든 개별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정직하지 않습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근거가 어디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개역한글)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설명이 고통받는 사람에게 곧바로 위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논증보다 곁에 머무는 일이 먼저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로봇처럼 악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하는 사랑은 사랑일까요?

이어서 볼 질문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을까요

하나님은 악을 왜 지금 당장 없애지 않으세요?

"악을 없애 달라"는 요구는 정당해요. 그런데 악은 세상 어딘가의 남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어요. 악을 당장 모두 없애는 하나님이라면 나의 잘못도 예외가 아니에요. 성경은 이 기다림을 인내와 긍휼로 설명해요.

악을 완전히 없애려면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 곧 나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을 인내와 긍휼로 설명합니다.

"악을 없애 달라"는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런데 악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남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습니다. 악을 당장 모두 없애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의 잘못도 그 기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여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십니다. 심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연은 방관이 아니라 초대의 시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 기다림 동안 고통받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은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질문을 숨기지 않고 시편의 탄식으로 그대로 가져옵니다. 기다림은 방치가 아니라, 교회와 신자가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함께 견디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24-30 (개역한글)

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설명은 악이 왜 "지금까지" 이 정도로 지속되는지를 완전히 해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성품을 판단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만약 오늘 밤 모든 악이 사라진다면, 나는 그 기준 앞에서 어떨까요?

이어서 볼 질문

왜 이렇게 아픈 일이 많을까요

지진이나 병 같은 재난은 왜 일어나나요?

재난을 당한 사람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라고 단정해서는 안 돼요.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성경은 세상 전체가 탄식하며 회복을 기다린다고 말해요.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자리에서 어떻게 곁에 설 것인지가 먼저예요.

모든 재난의 원인을 한 사람의 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세상 전체가 탄식하며 회복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죄가 많아서 재난을 당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단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학살 소식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고를 두고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함께 탄식하며 해방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의 고통은 처음 의도된 상태와 다른 깨어진 현실의 일부로 이해됩니다. 다만 개별 재난의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이 이해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질병과 재난 앞에서 신자는 원인을 판결하기보다 의료, 구호, 곁에 있음으로 응답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자연재해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 안에서도 이해가 다양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이 고통받는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로 쓰이는 것을 막는다는 점입니다.

말씀 속에서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1-5 (개역한글)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2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자연악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이 짧은 답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재난을 겪은 사람 앞에서 우리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사람과 곁에 앉아 주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되고 싶나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성경은 어떻게 전해졌는지, 불편한 본문은 어떻게 읽는지 살펴봐요.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성경, 정말 믿어도 되는 책인가요?

성경은 한 사람이 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증언과 문학이 모인 책이에요. 역사 이야기, 시, 예언, 복음서, 편지가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전해요. 그래서 맥락과 장르를 살피며 읽어야 하고, 사본과 역사 배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믿음을 약하게 하지 않아요.

성경은 여러 시대의 증언과 문학이 모인 책이며, 맥락과 장르를 살피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문장을 같은 방식으로 읽지는 않습니다. 역사 이야기, 시, 지혜 문학, 예언, 복음서와 편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전합니다.

사본과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일은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질문을 품은 채 예수님을 중심으로 읽고,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겹치기 때문입니다. 사본이 풍부하게 전해졌고(사본에 관한 아래 질문 참조), 복음서는 사건에 가까운 시기의 증언을 담고 있으며, 고고학과 역사 기록이 많은 배경을 뒷받침합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의문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은 질문으로 남겨 두고, 분명한 중심, 곧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읽어 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말씀 속에서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개역한글)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1-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어려운 본문과 학계의 논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이 질문에 정직한 태도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책이 "믿을 만하다"고 하려면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가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지금 읽는 신약, 원본과 같은 내용인가요?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약은 고대 문헌 가운데 사본이 가장 많고 가장 이른 편이에요. 헬라어 사본만 5,800점이 넘어서 서로 비교하며 본문을 복원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풍부해요. 다른 고대 책들은 사본 수십 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대 문헌 가운데 사본이 가장 많고 이른 편이라 본문을 재구성할 근거가 풍부합니다.

신약의 헬라어 사본은 5,800점이 넘고, 고대 번역본과 교부들의 인용까지 더하면 비교할 자료가 매우 많습니다. 다른 고대 저술들이 보통 사본 수십 점에 남아 있는 것과 비교됩니다. 가장 이른 요한복음 단편(P52)은 2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철자, 어순, 단어 하나의 차이 같은 사소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본들을 비교하는 본문 비평으로 가장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추정합니다. 의미가 달라지는 차이는 소수이고, 그것도 대부분 어느 쪽이 원문인지가 논의되고 있으며, 핵심 교리를 바꾸는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그래서 번역 성경에는 "어떤 사본에는 없음" 같은 각주가 붙기도 합니다. 숨기지 않고 알려 주는 것 자체가 본문을 정직하게 전하려는 노력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차이가 있다면 신뢰할 수 없다"는 반론은 모든 고대 문헌에 적용된다면 고대 역사 전체를 불신해야 합니다. 차이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본문이 얼마나 철저히 비교되고 있는지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직한 한계

사본의 신뢰성은 "본문이 정확히 전해졌는가"의 문제이고, 그 내용이 "참인가"는 별도의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복음서와 예수님에 대한 증거로 이어집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오래된 문서가 "정확히 전해졌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보나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복음서는 한참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 아닌가요?

복음서는 대체로 예수님 사후 수십 년 안에 기록되었다고 봐요.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신조는 사건 후 몇 해 안에 형성된 전승이라는 연구도 많아요.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 있던 시기라는 점이 전설설과 맞서는 중요한 단서예요.

복음서는 대체로 1세기에 기록되었고,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신조는 사건 후 몇 해 안에 형성된 전승으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복음서의 기록 시기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고 서기 60~70년대, 마태와 누가는 그 후, 요한은 1세기 말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 사후 약 35~70년 안입니다. 더 이른 시기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더 이른 증거도 있습니다. 바울이 서기 50년대에 쓴 서신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심을 전합니다. 많은 학자는 이 신조가 예수님 사후 몇 해 안에 예루살렘에서 형성된 전승이라고 봅니다.

누가는 서두에서 목격자들에게서 받은 것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쓴다고 밝힙니다. 이는 전설이 아니라 역사 기록을 쓰겠다는 의도를 보여 줍니다. 전설이 형성되려면 보통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고, 당시의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신앙을 가진 이들이 쓴 글이라 객관적이지 않다"는 반론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역사 기록에는 관점이 있고,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 기록의 신뢰성을 자동으로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역사가는 관점을 인정하면서 증거를 비교합니다.

말씀 속에서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3-8 (개역한글)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1-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복음서의 기록 시기와 저자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갈립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범위를 소개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사건이 "전설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얼마일까요? 그것은 이 경우에 어떻게 적용될까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성경에 모순이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모순처럼 보이는 곳은 대부분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서술했거나, 요약하거나 생략한 차이예요. 고대의 숫자와 기록 방식을 오늘의 기준으로 읽어서 생기는 오해도 많아요. 억지로 짜 맞추지도, 성급히 단정하지도 않는 읽기를 소개해요.

모순처럼 보이는 곳은 대부분 서술 방식, 관점, 생략의 차이입니다. 억지로 맞추지도, 성급히 단정하지도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본문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경우, 요약하거나 일부를 생략한 경우, 고대의 숫자 표기나 기록 관습을 오늘의 기준으로 읽은 경우, 그리고 정말로 해결이 어려워 보이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빈 무덤을 보고 온 여자들의 수나 천사의 수가 복음서마다 조금 다릅니다. 이것을 "한 명이 있었다"와 "두 명이 있었다"가 서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를 말하는 것은 둘이 있었다는 사실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여러 증인의 증언이 세부에서 다른 것은 오히려 조작되지 않은 증언의 특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정직한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어려운 본문을 억지로 짜 맞추지 않는 것, 그리고 모순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고 본문의 목적과 장르, 시대 배경을 살피는 것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모순이 하나라도 있으면 신뢰할 수 없다"는 기준은 어떤 역사 기록에도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순 여부가 아니라, 핵심 증언이 일관되고 설명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지입니다.

말씀 속에서

1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24:1-1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본문이 있습니다. 모든 어려움이 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이 질문에 정직한 답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같은 사건을 목격한 두 사람의 증언이 세부에서 다르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성경 속 전쟁과 노예제, 불편한데 어떻게 읽나요?

성경이 어떤 일을 기록했다는 것과 그 일을 승인한다는 것은 달라요. 먼저 서술과 규범을 구분하고, 당시 배경과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전체의 방향을 함께 봐요. 쉬운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요.

성경이 어떤 일을 기록했다는 것과 그 일을 승인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쉬운 답이 없는 질문이며, 예수님 안에서 전체를 읽는 것이 기독교의 방법입니다.

성경에는 전쟁, 학살, 노예제 같은 불편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서술"과 "규범"을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이 어떤 일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승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고대 근동의 사회 구조 안에서 주어진 법을 오늘의 기준으로 곧바로 읽으면 오해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당시 주변 사회와 비교하면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의 요소가 많았다는 평가가 있고, 동시에 그 법이 이상적인 모습을 모두 담은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어 왔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가 성경 전체를 읽는 기준이 됩니다.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도 이 성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끌어 냈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불편한 본문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변명 같다"는 느낌은 이해할 만합니다. 이 질문에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입장이 있고, 고통스러운 본문 앞에서 함께 고민하는 것을 신앙의 불성실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 속에서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3-4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답은 모든 어려운 본문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쉬운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불편한 본문 앞에서 "이건 틀렸어"라고 느끼는 기준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지 않나요?

구약에는 전쟁과 심판 장면이 나와서 하나님이 폭력적으로 보인다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한 면만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지만 구약은 자비와 인내로 가득한 하나님도 함께 말해요. 서술과 규범, 당시 배경, 예수님 안에서 읽는 전체 흐름으로 차분히 들여다볼게요.

구약의 하나님을 잔인하다고만 보면 절반만 읽은 것이고, 모두 아름답다고만 보면 질문을 피한 것입니다.

구약에는 불편한 장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심판의 장면은 많은 독자에게 큰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 것이 먼저입니다.

동시에 구약이 하나님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문장은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도 반복됩니다. 같은 구약 안에서 이 두 모습이 함께 나옵니다.

읽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성경이 어떤 일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또 고대 근동의 전쟁 기록은 과장된 수사를 쓰는 관습이 있어, 어느 정도까지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지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구약을 예수님 안에서 읽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님에게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래도 불편하다"는 반응은 자연스럽습니다. 이 글은 모든 불편함을 없애기보다 불편함을 정직하게 다루는 읽기를 소개합니다.

말씀 속에서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개역한글)

2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18:23 (개역한글)

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가나안 정복 같은 본문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혀 둡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이야기의 한 장면이 불편할 때, 그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먼저 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어서 볼 질문

성경, 믿어도 되는 책일까요

성경은 누가, 어떻게 66권으로 정했나요?

성경 66권은 한 번에 정해진 목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 신앙 공동체가 "이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확인해 온 결과예요. 외경이나 다른 복음서가 왜 빠졌는지도 많이 물어요. 책을 고르는 기준과 과정을 사실 위주로 쉽게 풀어 볼게요.

교회가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던 책들을 확인하고 정리했습니다.

구약은 예수님 시대에 이미 유대인 공동체에서 읽히던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을 언급하며 이 범위를 전제하셨습니다. 신약은 기원후 1~2세기에 사도들과 그 가까운 사람들의 글이 교회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고, 4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27권 목록이 여러 지역에서 공통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떤 책을 받아들일지에는 몇 가지 기준이 쓰였습니다. 사도와 연결된 글인가, 여러 교회에서 널리 읽혔는가, 이미 받아들여진 가르침과 일치하는가입니다. 도마복음 같은 이른바 영지주의 문서들은 훨씬 뒤의 시대(2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평가되어 이 기준에 맞지 않았습니다.

외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 시기의 유대 문헌을 가리키는 말인데, 가톨릭과 정교회는 이 중 일부를 구약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개신교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교단별로 정해져 있는 문제이며, 어느 쪽이든 신약의 중심 메시지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권력자들이 입맛에 맞게 골랐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정경 목록은 하루아침에 황제나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랜 사용 속에서 확인된 것으로 보는 연구가 많습니다.

말씀 속에서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 (개역한글)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개역한글)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15-16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정경 형성 과정의 세부 사항에는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있습니다. 이 글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큰 흐름을 소개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오래된 책들 중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를 가리는 기준을 정한다면 나는 무엇을 넣고 싶나요?

이어서 볼 질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실존, 주장,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차근차근 따라가 봐요.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실제로 살았던 사람인가요?

예수님이 실제로 살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점은 기독교인이 아닌 학자들도 거의 모두 인정해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예수님을 언급하고, 초기 그리스도인 증언도 이른 시기부터 이어져요.

예수님이 역사 속에 실제로 살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점은 기독교인이 아닌 학자들도 거의 모두 인정합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110년대에 쓴 글에서 "그리스도"가 티베리우스 황제 때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의 저술에서 예수님과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합니다. 요세푸스의 한 구절은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논쟁이 있지만, 야고보를 언급한 부분의 진정성은 널리 인정됩니다.

신약 안에서도 바울의 서신은 예수님이 죽은 지 20년 남짓 되었을 때 쓰이기 시작해,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을 실제 인물로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신화 속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은 일반 대중에게는 퍼져 있지만, 고대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논쟁은 "예수님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셨는가"에 있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기독교 밖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갈릴리 목수 출신의 한 운동가가 로마의 주요 기록에 많이 남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고, 오히려 이 정도의 언급이 남아 있는 것이 이른 편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18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라디아서 1:18-19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역사적 존재의 확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 질문이 이어집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예수님이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은 내게 어떤 다음 질문을 불러오나요?

이어서 볼 질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이 정말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셨나요?

예수님은 한 문장으로 선언하기보다 "나는 ~이다" 같은 말씀, 죄를 용서하시는 행동, 예배를 받으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두셨어요.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들어서 신성모독이라 반발했어요. 복음서의 장면들을 따라가 봐요.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는 말씀과 죄를 용서하시는 행동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두셨고,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주장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하나의 문장만이 아니라 말씀과 행동의 전체에서 드러납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해졌다"고 하시자 서기관들은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고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들어 치려 했고,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 한다"며 신성모독으로 여깁니다. 재판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시고, 이 대답이 사형의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도덕 선생이었다"는 말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주장과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주장이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단순히 존경할 만한 교사로만 남을 수는 없다는 점이 C. S. 루이스가 던진 물음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후대의 교회가 예수님을 신격화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습니다. 위의 본문들은 이른 복음서에도 나오고, 바울이 쓴 초기 신조에도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내용이 있어 신성 고백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말씀 속에서

5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마가복음 2:5-7 (개역한글)

58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8:58 (개역한글)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0-33 (개역한글)

61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마가복음 14:61-6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루이스의 논법에 대해 "전설일 가능성이라는 선택지를 놓쳤다"는 비판도 있어서, 이 논증은 복음서의 신뢰성 논의(앞의 질문)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예수님을 "훌륭한 스승"으로만 보는 입장과 비교할 때, 이 주장들은 어떤 선택을 요구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부활,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이야기인가요?

십자가 처형,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대담한 변화, 교회를 박해하다 회심한 바울, 빈 무덤. 이 사실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부활이라고 많은 이들이 주장해요. 다른 설명들(환각, 전설, 시신 도난)과 비교하며 증거를 따져 봐요.

십자가 처형, 변화된 제자들, 회심한 박해자, 빈 무덤. 이 사실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부활이라고 많은 이들이 주장합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는 것,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극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들을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논쟁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여자들이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전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꾸며 낼 의도였다면 이 선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 회의적이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후에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제자들이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꾸며 낸 것을 위해 죽기는 어렵다는 점이 이 증언의 무게를 더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대안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환각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여러 장소에서 같은 체험을 한 것을 설명하기 어렵고, 시신 도난설은 제자들이 자기가 훔친 것을 위해 순교한다는 점에서 어색하며, 기절설은 로마의 처형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다만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어떤 설명도 모든 사람을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3-8 (개역한글)

1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24:1-1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역사적 논증은 증거를 평가하는 데까지는 도울 수 있지만, 부활을 믿을지의 결단까지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이 질문은 증거와 함께 삶의 초대로 이어집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이 사실들을 설명하는 다른 가설이 있다면 무엇이고, 각각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왜 꼭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나요?

잘못이 가볍게 취급되는 세상은 정의롭지 않고, 잘못이 모두 심판받는 세상에는 우리 누구도 설 자리가 없어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면서도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려고 스스로 그 값을 치르셨다고 말해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려고 스스로 그 값을 치르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죄를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이웃 사이의 관계를 깨는 문제로 봅니다. 잘못이 가볍게 취급되는 세상은 정의롭지 않고, 잘못이 모두 심판받는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긴장 앞에서 십자가는 정의와 사랑이 함께 드러나는 자리로 소개됩니다.

이사야서는 한 종이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신약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 연결하며, 우리가 아직 죄인이던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전통은 십자가를 한 가지 이론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치르심, 악의 권세에 대한 승리, 사랑의 본보기 등 여러 이해를 함께 말합니다. 어떤 설명이든 중심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죄 없는 사람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이 정의로운가"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와 무관한 제3자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그 대가를 감당하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말씀 속에서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개역한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십자가의 의미는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의해 온 깊은 주제이고, 한 문단으로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누군가 내 잘못의 값을 대신 치러 준 경험이 있나요?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이어서 볼 질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삼위일체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고 고백해요.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존재로는 하나이고 위격으로는 셋이라는 뜻이라 같은 기준에서 1=3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이런 고백에 이르렀는지, 왜 중요하게 여기는지 쉽게 풀어 볼게요.

삼위일체는 머리로 풀어낸 수수께끼라기보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정리한 고백입니다.

먼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1=3"이라는 수학 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고백하며(존재는 하나), 그 한 분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신다고 말합니다. 같은 것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철학적 호기심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증언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예배받으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 일하시는 증언을 모두 만났습니다. 이 모든 증언을 함께 붙들려고 하다 보니 삼위일체라는 표현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신 분이라면, 사랑은 하나님의 부수적인 속성이 아니라 본질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으라는 것인가"라는 반론은 정당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 범위에 모두 담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신 개념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말씀 속에서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명기 6:4 (개역한글)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8:19 (개역한글)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린도후서 13:13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삼위일체는 비유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물, 얼음, 수증기 같은 흔한 비유도 한계가 분명해서, 이 글은 비유보다 성경 증언의 정리로 이해하기를 권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사랑이 본질인 하나님"과 "혼자 계신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과학이 답하는 질문과 신앙이 답하는 질문을 구분해 봐요.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과학과 신앙, 정말 서로 부딪히나요?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하고, 신앙은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왜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물어요. 역사 속 충돌도 있었지만 많은 과학자가 신앙을 가지고 연구했어요. 두 영역의 경계를 구분하면 대화가 훨씬 차분해져요.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하고, 신앙은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묻습니다.

역사적으로 과학과 종교가 충돌한 사례도 있지만, 모든 과학과 모든 신앙이 적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학적 증거를 존중하면서 신앙의 언어가 다루는 질문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과학을 대신해 사실을 결정하거나, 과학이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모든 질문을 대신 답한다고 말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과학자가 신앙을 가지고 연구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과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알아 가는 일이었습니다. 반대로 과학만으로는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 "무엇이 선한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어렵습니다.

충돌이 생기는 지점은 대개 과학의 결론 자체보다,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혹은 과학이 가르쳐 줄 수 없는 영역까지 과학의 이름으로 단정하느냐입니다. 두 영역의 경계를 구분하면 논쟁은 훨씬 줄어듭니다.

말씀 속에서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개역한글)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8:3-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과학과 신앙의 관계는 학자마다 모델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충돌과 협력이 모두 있었다는 정도의 지도를 보여 드립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까지 "과학 대 신앙" 구도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신앙을 버려야 하나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창조와 진화에 대한 입장은 다양해요. 젊은 지구를 믿는 사람, 지구의 나이는 과학과 같이 보는 사람, 진화를 하나님이 쓰신 방법으로 보는 사람이 있어요. 모두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고백은 같아요.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창조와 진화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며,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고백과 과학적 설명을 함께 붙드는 길이 있습니다.

이 주제에서 그리스도인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뉩니다. 창세기의 날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으로 읽고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 지구의 나이는 과학과 같이 보고 창조의 방식을 다르게 해석하는 입장, 진화의 과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으로 보는 입장(유신 진화)이 있습니다. 어느 입장도 "하나님이 창조자시다"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창세기 1장이 무엇을 말하려는 글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립니다. 우주의 과학적 연대기를 알려 주려는 글인지,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이야기와 달리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자이며 세상이 선하다는 선언을 하려는 글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신앙이 지켜야 할 핵심은 세계가 우연과 무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연구하는 방법과 과정이 이 고백과 반드시 충돌한다고 보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진화는 무신론으로 이어지지 않는가"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진화는 생물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 대한 과학 이론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진화를 철학적 무신론의 근거로 확장하는 주장은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개역한글)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어느 한쪽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 서로를 정죄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하는 것"이 꼭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일까요?

이어서 볼 질문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과학은 반복해서 관찰되는 자연의 규칙을 연구해요. 기적은 반복되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라 처음부터 실험 대상이 되기 어려워요. 그래서 "과학이 기적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맞지만 "과학이 기적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는 맞지 않아요.

과학은 자연이 보통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고, 기적은 그 보통의 흐름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질문입니다.

과학은 반복해서 관찰되는 자연의 규칙성을 연구합니다. 기적은 반복되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과학 실험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기적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맞지만, "과학이 기적을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기적에 대한 증언보다 자연법칙의 일관성이 더 믿을 만하다고 논증했습니다. 그러나 이 논증은 자연법칙이 깨진 적이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순환의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고, 하나님이 특별한 때에 다르게 일하시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믿을지는 하나님이 계신지, 그리고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지를 따져 보는 문제가 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기적 이야기는 과학이 없던 시대의 미신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의 사람들도 처녀가 아이를 낳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평소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놀랐고 의심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4-29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기적의 주장은 하나하나 증거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모든 기적 주장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거나 한꺼번에 거부하는 것은 모두 성급한 태도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기 위해 나는 어떤 종류의 증거를 요구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창세기 1장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창세기 1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사람도, 상징으로만 읽는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이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보다 "누가, 왜"에 가깝다는 점이에요. 고대의 독자에게 이 본문이 무엇을 말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읽어 왔는지 함께 살펴봐요.

창세기 1장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보다, 이 세계가 누구에게서 왔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본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쓰였습니다. 당시 주변 문화에서는 해, 달, 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해와 달을 그냥 "큰 광명체"로 부르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 놓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 대한 매우 도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읽는 방식에서 다양했습니다. 하루를 문자 그대로 24시간으로 읽는 입장, 긴 시간을 가리킨다고 보는 입장, 문학적 틀(날의 구조)을 가진 창조 선언으로 읽는 입장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창조자시고 세계는 선하게 지어졌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중심은 같습니다.

이 본문을 읽는 좋은 방법은 먼저 "이 본문이 어떤 질문에 답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질문에 답하려는 본문인지,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말하려는 본문인지를 구분하면 과학과의 불필요한 충돌도 줄어듭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러면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장르와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은 본문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원래 말하려는 바를 존중하는 일이라고 많은 신학자가 말합니다.

말씀 속에서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개역한글)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개역한글)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창조 본문의 해석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영역입니다. 어느 한 입장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 서로를 정죄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같은 글을 "역사 기록"으로 읽을 때와 "선언문"으로 읽을 때,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이어서 볼 질문

과학과 신앙, 싸우는 사이일까요

뇌과학으로 마음이 설명되면 영혼은 필요 없지 않나요?

뇌 활동을 측정하면 기쁨이나 두려움이 뇌의 어느 부분과 연결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렇다고 마음이 뇌 활동 그 자체임이 증명된 것은 아니에요. 상관관계와 같은 것임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해요. 신경과학과 기독교의 인간 이해가 어떻게 만나는지 쉽게 정리해 볼게요.

뇌와 마음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발견은 신앙과 충돌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라는 성경의 시각과 잘 만납니다.

신경과학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감정, 기억, 결정이 뇌의 특정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약물이나 손상이 성격과 감정을 바꿀 수 있다는 현실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연결되어 있다"와 "같은 것이다"는 다른 말입니다. 라디오 방송이 라디오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장치가 방송 내용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뇌의 관계는 철학에서도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과학이 최종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몸과 영혼을 구분해서 보는 입장도 있고, 사람을 몸과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합적 존재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성경은 사람을 몸을 가진 존재로 소중히 여기고, 몸의 돌봄과 마음의 돌봄을 함께 중요하게 다룹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의식도 결국 물질의 활동이라면 영혼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은 철학적으로 진지한 견해입니다. 다만 "의식이 왜 존재하는가"는 물리적 설명만으로 풀리지 않는 난제라고 보는 철학자도 많습니다.

말씀 속에서

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개역한글)

13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3-14 (개역한글)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주제는 과학과 철학 모두에서 현재도 연구 중입니다. 이 글은 어느 한 결론을 확정하기보다 질문의 구조를 정리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기쁨이나 사랑을 "뇌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은, 그 경험의 가치를 줄이나요, 그대로 두나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다른 신념을 존중하면서, 구원과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을 정직하게 다뤄요.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예수님만이 길"이라니, 너무 배타적이지 않나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고백해요. 하지만 이 고백이 다른 사람을 낮추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돼요.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최종 운명을 대신 판정할 권한이 없고, 예수님의 길은 힘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길이에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이 다른 사람을 낮추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거나 사람의 최종 운명을 대신 판정할 권한을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길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길로 제시됩니다.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복음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환대가 고백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줄 세우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은혜로 열렸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받은 선물에 대한 증언에 가깝습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이 고백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개역한글)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3-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이해가 나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견해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로 쓰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우리만 옳다"는 태도와 "내가 받은 선물을 나눈다"는 태도는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믿음이 약하면 구원받지 못하나요?

구원은 믿음의 양을 재서 얻는 성적이 아니에요. 복음서에는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한 사람이 나와요. 흔들리고 의심이 있어도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어요. 믿음은 은혜의 선물을 받는 손에 가까워요.

구원은 믿음의 양을 측정해 얻는 성과가 아닙니다. 흔들리는 사람도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의심과 질문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혼자 의지를 다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공동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관계입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정직한 기도 한 문장으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믿음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받는 상이 아닙니다. 은혜로 받는 선물이며, 믿음은 그 선물을 받는 손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도 작다고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이 아니라, 믿음의 근원이신 분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천천히 자라 가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마가복음 9:24 (개역한글)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개역한글)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개역한글)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충분히 믿는다"의 기준을 누가 정한다고 생각해 왔나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복음을 한 번도 못 들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서 공의롭게 행하신다고 말해요. 그래서 단정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할 책임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요. 성경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 봐요.

성경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서 공의롭게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단정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더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이 질문은 진지하게 던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정의롭게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앞에서 "온 세상의 재판장이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도 양심이 있어 스스로 율법이 되며, 그들의 양심이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빛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신다고 이해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이해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직접 듣고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강조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알려진 만큼 응답하는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허락하실 수 있다고 소망합니다. 모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럼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확신은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과 사랑 때문에 전한다는 동기로 이어집니다.

말씀 속에서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25 (개역한글)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4-15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성경이 이 질문에 대한 세부적인 답을 모두 주지는 않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이 질문이 내게 "그들은 어떻게 되나"만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로도 들리나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다고요?

예수님은 심판과 지옥을 자주 경고하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은 겁주려는 협박이 아니라 사랑의 경고로 읽혀요. 지옥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 갈래지만, 하나님이 멸망을 원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선택과 정의를 진지하게 여기신다는 점은 같아요.

지옥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 갈래이고, 공통점은 하나님이 멸망을 원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선택과 정의를 진지하게 여기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심판과 지옥을 자주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겁을 주려는 협박이 아니라 사랑의 경고로 읽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아와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지옥의 성격에 대해 기독교 전통에는 몇 가지 이해가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로 보는 전통적 입장, 최종적으로 소멸된다고 보는 조건적 불멸설(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 같은 이들이 이 견해에 열려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는다는 보편 구원론 등입니다. 교회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입장은 전통적 입장이지만 신학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강제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동시에 악과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영원히 벌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은 신학자들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이 질문을 불신앙으로 취급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 전체 안에서 계속 묻는 것이 건강한 태도입니다.

말씀 속에서

11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에스겔 33:11 (개역한글)

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지옥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믿음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 주제는 해석이 갈리는 영역을 포함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정의가 없는 사랑과 사랑이 없는 정의 중, 우리가 정말 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뭐가 다른가요?

많은 종교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올라갈지를 말한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오셨다는 사건 위에 서 있어요. 사랑과 자비 같은 공통점도 많고 다른 종교의 신실한 사람에게서 배울 점도 많아요. 존중하면서 차이를 정직하게 이야기해 봐요.

많은 종교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올라갈지를 말한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오셨다는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종교들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사랑, 자비, 정직 같은 가치를 가르치고,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초월적인 것에 마음을 둡니다. 다른 종교의 신실한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도 많습니다.

그 위에서 기독교가 다르게 말하는 것은 구원의 방향입니다. 많은 종교는 수행이나 선행, 깨달음으로 사람이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스스로는 도달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고, 구원은 은혜로 받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또 기독교의 중심에는 가르침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건, 곧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장은 증거를 따져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됩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모든 종교는 같은 산의 다른 길이 아니냐"는 말은 정중하지만, 각 종교가 실제로 주장하는 바를 같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종교들의 주장을 존중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말하면서 서로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14 (개역한글)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글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쓴 것이며, 다른 종교를 완전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대화가 먼저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다른 신앙을 가진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에서 내가 존중하고 배우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곳으로 가는 길 아닌가요?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여도 정상은 하나라는 비유를 자주 들어요. 따뜻한 말이지만, 종교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해요. 모두를 같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각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눠 봐요.

다름을 지우는 것이 존중이 아니라, 다름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이 존중입니다.

모든 종교가 같은 정상을 향한다는 비유는 널리 쓰이지만, 이 비유는 정상이 무엇인지 아는 시점이 이미 어느 한 종교의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놓치기 쉽습니다. 각 종교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인가, 비인격적인 힘인가, 사람의 근본 문제는 무지인가, 죄인가에 대한 답이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곧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실한 신자들은 대개 자기 믿음이 "참"이라고 믿기에 믿는 것입니다. 서로의 확신을 진지하게 듣는 것이 진짜 존중에 가깝습니다. 또한 모든 종교가 도덕적 가치와 아름다운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모든 종교의 핵심 주장이 같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고백은 "여러 길 중 가장 좋은 길"이라는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길을 내셨다는 선포입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이웃 종교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은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 말은 오만하게 들린다"는 반응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고백은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말이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누는 증언의 언어로 말해질 때 가장 건강합니다.

말씀 속에서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개역한글)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행전 17:26-27 (개역한글)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글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쓴 것이며 다른 종교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각 종교의 가르침은 그 신자들에게서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모두 같다"는 말과 "서로 다르지만 존중한다"는 말은 나에게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이어서 볼 질문

다른 종교, 그리고 구원과 심판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죽음 앞에서 가장 솔직한 질문이에요. 성경은 죽음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렇다고 마지막으로도 말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죽음 너머의 소망을 이야기해요. 다른 관점들(무로 돌아간다, 윤회한다)과 비교하며,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과 부활을 쉽게 풀어 볼게요.

기독교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소망을 말합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줍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입장, 다시 태어난다고 보는 입장,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입장은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만들어 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로만 보지 않고, 깨어진 세계의 일부로 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에 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믿는 사람도 죽음 이후에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사건에 뿌리를 둡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모든 세부를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죽음 직후의 상태, 마지막 부활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죽음을 마지막으로 두지 않으신다는 약속, 그리고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는 고백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죽은 뒤에 대한 이야기는 위로를 위한 상상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위로가 된다는 것과 그것이 참이라는 것은 별개의 질문이며, 기독교의 소망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라는 역사적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개역한글)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0-22 (개역한글)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립보서 1:21-23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죽음과 사후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조심스러운 주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께는 설명보다 곁에 있어 주는 일이 먼저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그 두려움에 어떤 답을 기대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에 실망했다면

교회의 잘못과 선한 열매를 함께 보며, 실망과 신앙 사이를 구분해 봐요.

교회에 실망했다면

교회에 실망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망과 상처를 축소하지 않아도 돼요. 먼저 자신의 안전과 존엄을 살피고, 믿을 만한 사람이나 외부 전문기관에 도움을 청해도 괜찮아요. 교회를 떠나는 것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같지 않아요. 천천히 회복하는 길을 같이 생각해 봐요.

상처와 부당함을 축소하지 말고,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과 존엄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교회의 잘못을 무조건 참거나 비밀로 유지할 의무는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와 외부 전문기관에 상황을 알리고 필요한 보호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잠시 거리를 두거나 다른 공동체를 찾는 것도 가능한 선택입니다. 교회에 대한 실망과 예수님에 대한 질문을 서둘러 같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에 실망했다는 감정은 정당합니다. 그 실망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구조적인 문제에서 온 것인지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 걸음이 보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라면 대화와 중재가, 반복되는 구조의 문제라면 다른 공동체를 찾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다릅니다.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혼자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건강한 공동체를 천천히 찾아가는 길도 신앙의 한 걸음입니다.

말씀 속에서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개역한글)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폭력, 성적 문제, 금전 착취 같은 심각한 일은 개인이 참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전한 사람과 전문기관의 도움을 구하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 내 실망은 한 사람의 잘못에서 왔나요, 반복되는 구조의 문제에서 왔나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에 실망했다면

십자군과 종교재판, 기독교의 본모습 아닌가요?

교회의 잘못은 사실이고 변명해서는 안 돼요. 다만 그 일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어긴 결과로 평가해야 해요.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폭력과 함께, 같은 신앙으로 폭력에 맞선 사람들도 함께 살펴봐요.

교회의 잘못은 사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 일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어긴 결과로 평가해야 합니다.

십자군은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시작되었고,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중세와 근세의 종교재판 또한 폭력과 부당함을 낳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변명하거나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십자군의 폭력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당시에도 이를 비판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한쪽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는 병든 이를 돌보았고, 그 전통에서 병원이 발전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노예 무역과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는 잘못과 선행이 함께 있는 역사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기독교인이 잘못했다면 기독교가 거짓이다"라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한 신념이 참인가는 그 신념을 따른다는 사람들의 행동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 신념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인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잘못을 회개하고 고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역사 전체를 짧게 요약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목은 교회의 어두운 역사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집단의 잘못을 평가할 때, 그 집단이 내세운 가르침과 실제 행동 중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에 실망했다면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을 막았나요?

"종교와 과학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요. 유럽의 대학은 중세 교회의 후원 속에서 시작되었고, 수도원은 고대 문헌을 필사해 보존했어요. 근대 과학의 많은 선구자가 신앙 안에서 연구했어요. 갈등 사례와 협력 사례를 균형 있게 살펴봐요.

"종교와 과학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중세 대학과 근대 과학의 많은 선구자가 신앙 안에서 일했습니다.

유럽의 대학은 중세 교회의 후원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볼로냐와 파리, 옥스퍼드의 대학들은 신학뿐 아니라 법학, 의학,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수도원은 고대 문헌을 필사해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 과학을 연 케플러, 보일, 뉴턴, 패러데이 같은 사람들은 신앙인이었고, 자연이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멘델은 수도사였습니다.

갈릴레오 재판(1633년)은 자주 인용되는 갈등의 사례입니다. 이 사건에는 신학적 논쟁뿐 아니라 개인 간 갈등과 정치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이 최근 역사 연구의 평가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잘못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래도 교회가 과학을 억압한 사례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은 맞습니다. 교회의 일부가 새로운 발견을 두려워하여 잘못 대응한 사례가 있었고, 이는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기독교와 과학 전체의 관계로 일반화하는 것은 역사 연구의 평가와 맞지 않습니다.

말씀 속에서

2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시편 111:2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과학사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분야이고, 사례마다 평가가 다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어디서 들었나요? 그 이야기는 어떤 사례만 보여 주고 있었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에 실망했다면

교회엔 왜 위선적인 사람이 많아 보일까요?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교회는 완벽한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그렇다고 위선을 변명할 수는 없어요. 위선은 마땅히 돌아봐야 할 문제예요.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변명할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죄인의 모임이라는 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위선이 용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책망하신 대상이 종교적 위선이었다는 점은 기억할 만합니다. 신앙을 말하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 행동은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비판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교회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예수님에 대한 질문과 서둘러 같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를 받았다면 그 아픔을 먼저 존중받아야 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아프지만 정직한 질문입니다. 변화는 하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과정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이해이고,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씀 속에서

17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교회 안에서 실제 피해를 겪은 경우에는 안전과 보호가 먼저입니다. 바로 앞의 "교회가 실망스러울 때" 항목도 함께 읽어 보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나는 내가 믿는 것과 사는 모습이 다를 때, 그 간격을 어떻게 대하나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에 실망했다면

교회와 목사님의 돈 문제, 믿을 수 있나요?

교회의 재정 비리 소식을 들으면 헌금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건강한 교회는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게 해요. 성경이 돈에 대해 말하는 원칙과 건강한 교회를 가려내는 체크 포인트를 쉽게 소개해 볼게요.

교회의 재정은 성도가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질문받을 수 있어야 건강합니다.

교회의 재정 문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드러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일들로 상처받은 분들의 불신은 정당한 반응입니다.

성경은 교회 지도자에게 돈을 사랑하지 않을 것, 정직하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았고 손으로 일하며 필요를 채웠다고 말합니다. 또한 헌금은 억지로나 부담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재정 보고서를 공개하는가, 여러 사람이 함께 승인하는 구조인가, 외부 감사를 받는가, 헌금을 강요하거나 액수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가, 질문을 하는 사람을 불편해하지 않는가입니다. 이런 점을 확인하고 투명하지 않다면 다른 곳을 살펴보는 것도 지혜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교회는 다 비슷하지 않나"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같지는 않으며,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일부의 잘못이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일부의 잘못을 가볍게 볼 수도 없습니다.

말씀 속에서

7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개역한글)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사도행전 20:33-35 (개역한글)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디모데전서 3:2-3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헌금의 방식(십일조 등)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입장이 다릅니다. 이 글은 재정의 투명성과 자발성의 원칙을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어떤 단체에 돈을 낸다면, 나는 어떤 정보를 볼 수 있을 때 안심할 수 있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시작하기, 기도, 의심, 하나님의 뜻처럼 믿음의 일상에서 만나는 질문이에요.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기도해도 아무 대답이 없을 땐 어떻게 하나요?

응답이 늦거나 다르게 느껴진다고 기도한 사람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에요. 시편에는 기다림과 침묵 앞의 솔직한 기도가 많이 담겨 있어요. 기도는 결과를 얻어 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내어놓는 관계예요.

응답이 늦거나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서 기도한 사람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는 기다림과 침묵에 대한 솔직한 기도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내어놓는 관계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믿을 만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의료·상담·법률 등 필요한 현실의 도움을 함께 구하는 것도 믿음의 한 방식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흔히 "내 믿음이 부족한가" 하고 자신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도자들도 오래 기다렸고, 예수님도 응답이 "예"만은 아닌 기도를 하셨습니다.

응답의 방식은 때로 상황의 변화일 수도, 내 마음의 변화일 수도, 기다림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침묵 속에서도 기도의 자리를 완전히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13:1-2 (개역한글)

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2:42 (개역한글)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오래 이어지는 무력감이나 우울감이 함께 있다면, 믿음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도 구하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하나님께 어떤 말을 가장 하고 싶나요?

이어서 볼 질문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의심이 들면 믿음이 없는 걸까요?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이 자라는 과정에 있을 수 있어요.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내쫓지 않고 찾아가 상처를 보여 주셨어요. 의심을 숨기지 말고 정직하게 들고 오는 길을 같이 살펴봐요.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이 자라는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질문하고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을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어 내쫓지 않고 찾아가 상처를 보여 주셨고, 도마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의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지적인 의심(정말 사실인가), 감정적인 의심(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순종을 피하려는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심인지 구별하면 다루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의심이 들 때는 질문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 믿을 만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 질문을 구체적으로 적고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믿음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의심이 있는 채로 교회에 가는 것은 위선 아닌가"라는 걱정이 있습니다. 의심을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가 더 건강합니다. 의심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위선입니다.

말씀 속에서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4-29 (개역한글)

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마가복음 9:2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깊은 의심이나 우울감이 함께 있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 가장 풀고 싶은 의심을 한 문장으로 쓴다면 무엇인가요?

이어서 볼 질문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하나님의 뜻은 한 번의 신비한 음성보다 성경, 기도, 지혜로운 조언, 상황을 함께 살피는 가운데 분별되는 경우가 많아요. 성경이 이미 밝힌 큰 방향(정직, 사랑, 약자 돌봄)에서 출발하고, 중요한 결정에는 현실의 전문적 도움도 함께 구해요.

하나님의 뜻은 한 번의 신비한 음성보다, 성경과 기도, 지혜로운 조언, 상황을 함께 살피는 가운데 분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의 큰 방향을 이미 많이 알려 줍니다.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 방향에 어긋나는 선택은 어떤 느낌이 들어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결정에서는 기도, 말씀, 믿을 만한 사람들의 조언, 내가 가진 능력과 상황을 함께 살피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성경은 권합니다. 마음이 떠올리는 강한 느낌은 참고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결정을 한 뒤에도 결과가 기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길을 잘못 들었다는 뜻은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과 실수 가운데서도 일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하나님이 분명히 알려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답답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이 말하는 길은 지금 알고 있는 것부터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개역한글)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중요한 결정(진로, 결혼, 건강, 재정)에서는 신앙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현실의 전문적 도움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조언도 함께 구하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 앞둔 선택에서 "이미 말씀이 분명하게 말하는 방향"은 무엇인가요?

이어서 볼 질문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믿으면 인생이 편해지나요?

성경은 믿는 사람에게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약속해요. 예수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어요. 편안함의 약속이 아니라 동행의 약속이라는 점을 같이 살펴봐요.

성경은 믿는 사람에게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이미 승리하신 분이 계시다는 약속입니다.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고통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시련이 인내를 낳고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는 이해입니다. 믿음의 삶은 어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라 어려움을 다르게 통과하는 삶으로 소개됩니다.

믿으면 반드시 건강해지고 부자가 된다는 이른바 번영의 복음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병이 낫지 않거나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그러면 믿는 것이 무슨 유익이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속하는 것은 문제의 제거보다 관계, 곧 어떤 형편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과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말씀 속에서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3 (개역한글)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2-4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항목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지, 고통을 가볍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믿으면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그 기대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어서 볼 질문

믿음, 어떻게 살아가나요

믿어 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나요?

거창한 결심이나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처음 찾아온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셨어요. 작은 걸음으로 시작하는 방법이에요. 성경의 한 부분 읽기, 솔직한 기도, 믿을 만한 사람과의 대화, 교회 방문까지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할게요.

믿음은 모든 질문이 풀린 뒤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와서 보며 알아 가는 걸음에서 자랍니다.

처음 신앙을 생각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은 "아직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초대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확신이 걸음 앞에 오는 것이 아니라 걸음 속에서 자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서 중 가장 짧은 마가복음을 하루 한 단락씩 읽어 보세요. 둘째, "하나님, 계시다면 저에게 알려 주세요"처럼 솔직하게 기도해 보세요. 셋째, 신앙이 있는 사람 중에 질문을 편하게 받아 줄 사람을 찾으세요. 넷째, 한 번 교회 예배에 가 보세요.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다른 곳을 가도 괜찮습니다.

삼시세끼의 복음밥, 묵상 시작하기 같은 쉬운 길잡이도 있습니다. 질문이 생기면 이 Q&A로 돌아와 찾아보세요. 서두를 필요는 없고, 정직하게 질문하는 길이 이미 시작입니다.

자주 나오는 반론

"확신이 없는 상태로 시작해도 되는가"라는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이 의심과 질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 속에서

39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요한복음 1:39 (개역한글)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7 (개역한글)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개역한글)

정직한 한계

이 글은 시작을 돕기 위한 안내이며 한 사람의 신앙의 여정은 각자 다릅니다.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속도로 걸으세요.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금 나에게 가장 부담이 덜한 첫걸음은 무엇인가요? (읽기, 기도, 질문, 방문 중에서)

이어서 볼 질문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기도, 마음, 교회, 가정, 돈처럼 아주 현실적인 질문이 생겨요. 여기서는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 길을 쉽게 정리했어요. 카드를 눌러 자세히 보기를 열면 풀어보기, 말씀, 오늘 해 볼 한 가지가 나와요.

질병·안전·법률 문제는 전문가의 도움이 먼저예요. 이 글은 상담이나 진료를 대신하지 않아요.

기도,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응답이 없을 때, 말이 안 나올 때,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기도, 이렇게 해도 될까요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 낙심돼요

응답이 없다고 느끼는 때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 시간은 하나님이 떠나신 때가 아니라, 기도의 중심이 "내 조건"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옮겨 가는 때일 수 있어요. 들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답의 시작이에요.

침묵은 거절이 아니에요. 들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먼저예요.

응답이 빨리 오던 때도 있고, 아무 소리도 없는 듯한 때도 있어요. 둘 다 정상적인 신앙의 길이에요. 성경 속 기도의 사람들도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물었고, 그 물음은 기도 안에서 허락된 말이었어요.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기도를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만 쓰면 응답이 늦을 때 곧바로 흔들려요. 반대로 기도를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면, 들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이미 의미를 가져요. 응답의 때와 방법은 아버지의 몫이고, 우리는 구하는 자리에 계속 머무는 쪽이에요.

응답이 더딜 때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도 있어요. 처음에는 "이걸 해 주세요"였던 기도가 어느새 "이 일 가운데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계세요?"로 바뀌어요. 그 변화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말씀 속에서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13:1-2 (개역한글)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1-5 (개역한글)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기도 마지막에 "응답을 주시든 아니든, 들어 주시는 것에 감사해요" 한 문장만 덧붙여 보세요.

짧은 기도

아버지, 제 기도가 허공에 닿는 것 같아도 들으시는 분이 계심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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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렇게 해도 될까요

간절히 믿기만 하면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나요?

믿음은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에요. 성경은 구하라고 말하지만,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께 맡기라고도 해요. 간절함의 크기보다 누구에게 구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믿음은 소원을 이루는 기술이 아니라, 아버지를 신뢰하는 마음이에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은 흔히 "간절히 믿으면 이루어진다"로 읽혀요. 그런데 같은 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을 다 받아 누리지 못하고도 끝까지 신뢰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믿음은 결과를 보장받는 계약이 아니에요.

구하는 것과 맡기는 것

예수님은 구하라고 하셨고, 동시에 구하기 전에 이미 아버지가 우리 필요를 아신다고도 하셨어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 자신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라고 기도하셨어요. 간절히 구하되 결과를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 믿음의 모양이에요.

믿음이 약해서 응답이 없었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믿음을 의심하면, 기도는 점점 시험대가 돼요.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아버지는 선하시다는 것, 그 신뢰가 믿음이에요.

말씀 속에서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개역한글)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개역한글)

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2:42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질병이나 위기 앞에서는 기도와 함께 필요한 도움(치료, 상담, 지원)을 받는 것이 불신앙이 아니에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을 한 문장으로 쓰고, 그 끝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를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아버지, 구할 것은 구하되 결과는 아버지께 맡기는 믿음을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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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렇게 해도 될까요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느낌이 없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에요.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지났어요. 느낌이 아니라 약속에 기대어, 작게라도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이 그 시간을 지나는 방법이에요.

느낌은 오르내려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예요.

신앙이 처음에는 감정이 풍성하다가 어느 날 건조해지는 일이 흔해요.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시간을 "광야"라고 불렀어요. 광야는 버려진 곳이 아니라, 느낌이 아닌 믿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는 곳이에요.

이럴 때 해 볼 수 있는 것

첫째, 솔직하게 말하세요. 시편에는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기도가 그대로 실려 있어요. 둘째, 말씀을 많이 읽기보다 한 구절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세요. 셋째, 혼자 버티지 말고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지금 상태를 말하세요.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이 약속은 우리 감정에 달려 있지 않아요. 느껴지지 않는 날에도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오늘의 붙잡을 줄이에요.

말씀 속에서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1-2 (개역한글)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개역한글)

15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사야 49:15-16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오랫동안 아무 의욕이 없고 일상이 무너진다면 영적인 문제만으로 보지 말고 상담이나 진료도 함께 받아 보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시편 22:1-5를 천천히 한 번 읽고, 지금 느끼는 그대로를 한 줄로 기도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느껴지지 않아도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붙잡고 오늘을 걷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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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렇게 해도 될까요

기도가 짧고 서툴러요. 이래도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기도는 말솜씨를 겨루는 시간이 아니에요. 길이와 표현보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말이 막힐 때는 마음을 그대로 올려도 괜찮고, 성경은 그럴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해요.

멋진 문장이 아니라, 솔직한 한마디면 충분해요.

기도를 잘 못한다는 부담 때문에 아예 멈추는 분이 많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를 길고 화려하게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쪽을 가르치셨어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많이 말해야 들으신다고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이렇게 시작해 보세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오늘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감사 하나와 부탁 하나를 덧붙이세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말이 안 나오는 날은 한숨이나 침묵으로 앉아 있어도 돼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했어요.

함께 모여 기도할 때도 같아요. 목소리가 크거나 말이 유창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버지께 마음을 모으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요.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면 기도는 공연이 되고, 아버지만 바라보면 대화가 돼요.

말씀 속에서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개역한글)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개역한글)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누가복음 11:1-4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잠들기 전, "아버지, 오늘 하루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것이 힘들어요" 두 문장으로만 기도해 보세요.

짧은 기도

아버지, 말이 서툴러도 제 마음을 그대로 들어 주시니 감사해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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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불안, 분노, 낙심, 자책처럼 감정이 앞서는 날의 질문이에요.

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믿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신앙이 있어도 불안은 찾아와요. 불안 자체가 죄는 아니에요. 다만 불안이 올 때 그 마음을 혼자 끌어안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연습이 필요해요. 오늘 할 걱정은 오늘 몫만, 내일 일은 내일 맡기는 것이 출발점이에요.

불안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불안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세요.

건강, 진로, 돈처럼 현실의 걱정이 클수록 믿음이 부족해서 불안한 것 아닌가 하고 자책하게 돼요. 하지만 성경에서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이었어요. 중요한 것은 불안이 있느냐보다 그 불안을 어디로 가져가느냐예요.

불안이 올라올 때 세 단계

첫째, 불안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세요. 막연한 두려움은 크게 느껴지지만 글로 쓰면 크기가 보여요. 둘째, 그중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와 맡겨야 하는 일을 나누세요. 셋째, 맡겨야 하는 것을 소리 내어 하나님께 말씀드리세요.

예수님은 걱정한다고 키가 한 뼘도 자라지 않는다고 하시며 오늘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이 말씀은 걱정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가 새와 꽃도 돌보시니 너는 더 귀하다는 초대예요.

말씀 속에서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개역한글)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 (개역한글)

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5:7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가슴 두근거림, 불면, 일상 기능 저하가 오래 이어지면 불안장애일 수 있어요. 믿음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불안한 것 세 가지를 쓰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에는 ○, 맡겨야 할 것에는 △ 표시를 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 불안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려요. 오늘의 몫만 감당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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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화가 나요. 참아야 하나요, 풀어야 하나요?

화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문제는 화를 어떻게 다루느냐예요. 눌러 두면 원한이 되고, 터뜨리면 관계가 깨져요. 먼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쏟아 놓고, 해가 지기 전에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해요.

분노는 죄가 아니에요. 분노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길이에요.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하셨어요. 그러니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해요. 화를 느끼는 것과 화에 끌려가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화를 다루는 순서

먼저 잠깐 멈추세요. 말하기 전에 숨을 세 번 쉬는 것만으로도 폭발이 줄어요. 그다음 하나님께 화난 이유를 그대로 말씀드리세요. 사람에게 쏟기 전에 하나님께 쏟으면 마음이 정리돼요. 마지막으로 필요하다면 감정이 가라앉은 뒤 차분하게 상대에게 말하세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내가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안심이에요. 그렇게 내려놓을 때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져요.

말씀 속에서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에베소서 4:26-27 (개역한글)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야고보서 1:19-20 (개역한글)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19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다음에 화가 올라오면 답장이나 말을 하기 전에 10분 멈추고, 그 사이 하나님께 한 문장으로 말씀드려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분노를 품고 잠들지 않게 하시고, 제 감정을 먼저 주님께 쏟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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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자꾸 낙심되고 주저앉고 싶어요

낙심은 누구에게나 와요. 잠깐 주저앉는 것은 약함이 아니에요. 다만 낙심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시선을 "나의 능력"에서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옮기는 연습이 필요해요. 작은 한 걸음이면 충분해요.

주저앉아도 괜찮아요. 거기서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세요.

낙심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이 있을 때가 많아요. 자기를 너무 크게, 혹은 너무 작게 보는 시선이 낙심을 키워요. 성경이 말하는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시고 붙드시는 존재예요.

낙심할 때 붙잡을 것

하나님은 큰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정직하게 서 있는 사람과 일하세요.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를 하세요. 설거지, 안부 문자, 짧은 산책도 괜찮아요. 그리고 낙심이 길어질수록 혼자 있지 말고 한 사람에게 말하세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깊은 슬픔을 겪으셨어요. 그러니 낙심하는 우리를 향해 "왜 그러냐"고 나무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서 계신 분이에요.

말씀 속에서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개역한글)

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개역한글)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 하나를 정해서 하고, 끝나면 "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려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주저앉은 이 자리에서도 저와 함께 계신 것을 믿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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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같은 잘못을 반복해요. 자책이 멈추지 않아요

자책과 회개는 달라요.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이고, 자책은 자기 안에 갇히는 일이에요. 성경은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신다고 약속해요.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다시 시작이 복음의 방향이에요.

정죄는 우리를 가두고, 용서는 우리를 다시 걷게 해요.

반복되는 잘못 앞에서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돼요. 이때 중요한 것은 "다시는 안 해야지"보다 "넘어졌지만 돌아갑니다"예요. 하나님은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시는 분이에요.

자책에서 회개로

먼저 잘못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그리고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세요. 이어서 반복을 끊을 수 있는 현실의 장치를 하나 만드세요. 같은 상황을 피하거나,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말하거나, 환경을 바꾸는 일이에요.

자책이 클수록 "나는 안 돼"라는 목소리가 커져요.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문장이에요.

말씀 속에서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개역한글)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개역한글)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편 103:12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특정 습관이나 중독이 오래 반복된다면 혼자 싸우지 말고 상담이나 회복 모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예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잘못을 하나만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요일 1:9를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정죄가 아니라 용서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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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무기력하고 지쳤어요. 쉬어도 괜찮을까요?

쉼은 게으름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일곱째 날에 쉬셨고, 예수님도 사람들을 섬긴 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어요. 지쳤다면 더 열심히 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멈추고 회복하라는 신호일 수 있어요.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도 순종이에요.

번아웃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자주 와요. 신앙생활을 하는 분은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오래 버티기도 해요. 그런데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도 지칠 때가 있었어요. 엘리야는 지쳐서 죽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먼저 먹이시고 재우셨어요.

회복의 순서

먼저 몸을 돌보세요. 잠, 식사, 산책 같은 기본이 영적인 일보다 먼저일 때가 있어요. 그다음 지금 하는 일 중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을 하나 고르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조용한 시간을 아주 짧게라도 가지세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겠다고 초대하셨어요. 그 초대는 더 잘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내려놓으라는 말이에요.

말씀 속에서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개역한글)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열왕기상 19:5-8 (개역한글)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마가복음 6:31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지속적인 우울감, 수면·식욕 변화가 2주 이상 이어지면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세요. 그것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한 상태예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에 내려놓을 일 하나를 정하고, 하루 중 20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으로 비워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쉬는 것도 순종임을 알게 하시고 회복의 시간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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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건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니에요. 몸의 병이나 마음의 우울을 믿음의 부족으로 연결 짓는 것은 조심해야 해요. 예수님도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물음에 그렇게 단정하지 않으셨어요. 아픔에는 기도와 함께 치료와 돌봄이 필요해요.

아픔은 믿음의 성적표가 아니에요. 돌봄이 필요한 자리예요.

"기도가 부족해서 아프다"는 말은 아픈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돼요. 성경은 질병을 개인의 죄와 단순하게 연결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다가가 고치고 돌보셨어요.

기도와 치료는 함께

병원에 가는 것도, 약을 먹는 것도, 상담을 받는 것도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의사와 상담자도 하나님이 주신 돌봄의 통로가 될 수 있어요. 기도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균형 잡힌 믿음이에요.

주변 사람이 아플 때는 이유를 해석해 주기보다 곁에 있어 주세요. 우리는 남의 아픔을 해석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함께 울라고 부름받았어요.

말씀 속에서

1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1-3 (개역한글)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개역한글)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극단적인 생각이 들거나 혼자 견디기 힘들다면 지금 바로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기관(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에 연락해 주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힘든 상태를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말하고, 필요하면 진료나 상담 예약을 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아픈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도움을 만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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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자꾸 남과 비교되고 내가 부족하게 느껴져요

비교는 지는 게임이에요. 남보다 앞서도 불안하고 뒤처지면 낙심돼요. 성경은 내 가치를 남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에서 찾으라고 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 건강한 길이에요.

나를 재는 자는 남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이에요.

SNS와 경쟁이 일상인 시대에 비교를 피하기는 어려워요. 비교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번갈아 오가게 하고, 둘 다 나를 정확히 보여 주지 못해요. 우월감도 열등감도 결국 나를 중심에 두는 마음에서 나와요.

하나님이 보시는 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바이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해요. 베드로가 요한과 자신을 비교하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내 길은 내 길이에요.

비교가 올라올 때는 감사 하나를 적어 보세요.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위해 짧게 기도해 보세요. 마음이 조금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말씀 속에서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개역한글)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21-22 (개역한글)

12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린도후서 10:12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나를 비교하게 만든 대상을 하나 떠올리고, 그 사람을 위한 짧은 기도와 내게 있는 감사 하나를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남의 길이 아니라 제게 주신 길을 감사로 걷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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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는 날에

이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연단일까요, 사탄의 시험일까요?

원인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요. 성경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 안에서 선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해요. 원인을 판단하기보다, 지금 이 고난 속에서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물어보는 것이 도움이 돼요.

이유를 다 몰라도, 이 길에 함께 계신 분을 믿을 수 있어요.

욥은 고난의 이유를 끝내 다 알지 못했어요. 친구들은 이유를 단정했지만 하나님은 그 해석을 바로잡으셨어요. 우리가 남의 고난은 물론 내 고난의 원인을 완벽히 알기란 어려워요.

원인보다 반응

고난은 때로 우리 안의 문제를 드러내고, 때로는 이유 없이 닥치기도 해요. 어느 쪽이든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를 빚으실 수 있어요. 물어볼 것은 "왜 나에게"보다 "이 일 가운데서 주님은 나를 어디로 이끄시나요", 그리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순종은 무엇인가요"예요.

고난을 겪는 사람 곁에서는 해석보다 동행이 더 필요해요. 이유를 알려 주려 하기보다 함께 앉아 있어 주세요.

말씀 속에서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개역한글)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2-4 (개역한글)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6-18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겪는 어려움을 적고, 그 옆에 "이 일 가운데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이유를 다 몰라도 이 길을 함께 걸어 주시는 것을 믿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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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말씀이 안 읽히고, 믿음이 식고, 뜻이 막막할 때.

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펴면 졸려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이해하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에요. 분량을 줄이고, 질문을 하나 가지고 읽고, 이해가 안 되는 곳은 표시만 하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졸음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방법이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어요.

많이 읽기보다, 한 구절을 천천히 만나는 쪽이 오래가요.

성경이 어려운 데는 이유가 있어요. 오래된 책이고, 문화와 배경이 달라요. 그래서 구약의 긴 족보나 율법을 읽다가 멈추는 일은 아주 흔해요. 처음부터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차례로 읽는 방식이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에요.

이렇게 시작해 보세요

복음서(마가복음처럼 짧은 것)부터 시작하세요. 하루 한 단락만 읽고, 두 가지를 적어 보세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와 "오늘 내게 말하는 한 문장은 무엇인가". 졸음이 오면 자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맑은 시간에 읽어 보세요.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깨달을 수 있게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넘어가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어요. 이해는 한 번에 오지 않고 반복 속에서 어느 날 열려요.

말씀 속에서

18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개역한글)

45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누가복음 24:45 (개역한글)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사도행전 8:30-31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마가복음 1장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고, "오늘 내게 말하는 한 문장"만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말씀이 열려 이해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앉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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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믿고 싶은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의심이 있다고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성경에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라고 말한 사람도 있어요. 의심을 숨기지 말고 정직하게 들고 와서, 말씀을 계속 만나며 기다려 보세요.

의심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시작일 수 있어요.

세상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부딪히는 곳이 생겨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믿음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의문을 가진 채로 계속 걸으며 쌓이는 신뢰에 가까워요.

의심할 때 해 볼 수 있는 것

첫째, 의심을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꿔 적어 보세요. 막연한 의심은 힘이 세지만 질문이 되면 찾아볼 수 있어요. 둘째, 그 질문을 믿을 만한 사람이나 자료와 함께 살펴보세요. 셋째, 답이 없는 질문은 보류하고, 이미 확신이 가는 부분을 붙들고 걸으세요.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내치지 않고 찾아가셨어요. 의심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이 위로가 돼요.

말씀 속에서

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마가복음 9:24 (개역한글)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7-29 (개역한글)

22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 1:22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이 페이지의 "구도자 Q&A" 탭에서 의심과 관련된 변증 질문(고난, 성경의 신뢰성, 부활 등)을 더 깊이 다루고 있어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가장 큰 의문 하나를 질문 한 문장으로 적고, "구도자 Q&A"에서 비슷한 주제를 찾아 읽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믿음이 약한 저를 도우시고 의문 속에서도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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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뜨겁던 신앙이 식어가는 것 같아요

처음의 뜨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많은 사람이 겪는 과정이에요. 감정의 온도가 내려가도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에요.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작은 습관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길이에요.

식은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신뢰로 옮겨 가는 시간일 수 있어요.

신앙의 초기에는 감동과 열정이 크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으로 내려와요. 이것을 곧바로 타락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다만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슬며시 멀어지는 일은 실제로 있어요.

다시 불을 지피는 법

성경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돌이키라고 말해요.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무엇이 나를 움직였는지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거창한 결심 대신 아주 작은 습관을 다시 시작하세요. 매일 한 구절, 하루 한 번의 감사 기도, 주일 하나의 만남이면 충분해요.

식은 것 같을 때 자신을 비난하면 더 멀어져요. "다시 돌아왔어요" 하고 말씀드리는 것만으로 이미 돌아선 거예요.

말씀 속에서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4-5 (개역한글)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개역한글)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12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때를 세 줄로 적어 보고, 오늘부터 일주일간 하루 한 구절 읽기를 시작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처음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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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설교도 듣고 예배도 드리는데 제 삶은 그대로예요

듣는 것만으로 삶이 바뀌지는 않아요. 말씀이 삶에 들어오려면 한 가지를 정해 실제로 해 보는 단계가 필요해요. 많이 듣기보다 하나를 붙잡고 오늘 살아 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에요.

많이 듣는 것보다, 하나를 오늘 살아 내는 것이 변화를 만들어요.

예배와 설교를 열심히 접하는데 변화가 느껴지지 않으면 답답해요.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에요.

들은 말씀을 삶으로

주일에 들은 말씀 중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을 적으세요. 그 문장을 이번 주 어떤 상황에서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정하세요. 예를 들면 "이번 주 점심 전에 한 번 짧게 감사 기도하기" 같은 작은 일이에요. 일주일 뒤 해 보았는지 돌아보세요.

변화는 한 번에 크게 오지 않고 작은 순종이 쌓여서 와요. 하나님은 우리의 속도를 아세요.

말씀 속에서

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23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22-25 (개역한글)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개역한글)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태복음 7:24-25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 설교나 묵상에서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을 적고, 언제 어디서 해 볼지 정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살아 내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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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선택 앞에서 막막해요

구체적인 선택의 답을 한 번에 듣는 방식보다, 이미 말씀에 기록된 뜻을 따라 걸으며 기도와 조언과 상황을 함께 살피는 것이 지혜로워요. 성경은 거룩, 사랑, 감사 같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 줘요.

먼저 이미 밝히 알려 주신 뜻을 살고, 나머지는 기도와 지혜로 걸어가요.

진로나 결혼, 이직 같은 큰 선택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을 알고 싶어져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밝히신 뜻은 많아요. 거룩하게 살 것,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것,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것 같은 것이에요.

선택 앞에서 살펴볼 것

첫째, 말씀과 충돌하지 않는지 확인하세요. 둘째,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과 동기를 살피세요. 셋째, 믿을 만한 신앙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세요. 넷째, 현실의 조건과 내 은사를 살피세요. 이 네 가지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확신이 쌓여요.

결정하고 나서도 하나님이 길을 열고 닫으실 수 있어요. 완벽한 확신을 기다리다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기도하며 한 걸음 내딛고 인도하심을 보는 편이 나아요.

말씀 속에서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3 (개역한글)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개역한글)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앞둔 선택을 한 줄로 적고, 말씀·기도·조언·현실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분별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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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성령 충만이 뭔가요? 저는 받은 건지 모르겠어요

성령 충만은 특별한 체험 한 번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계속 열려 있는 삶이에요. 성경은 그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같은 성품을 말해요. 체험의 크기보다 열매와 방향을 보세요.

체험의 크기보다, 날마다 맺히는 열매를 보세요.

성령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아요. 성경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의 일이라고 해요. 그러니 느낌이 약하다고 성령이 없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어요.

성령 충만의 모양

에베소서 5:18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해요. 이것은 한 번 받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계속되는 상태예요. 그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예요. 삶에서 이런 열매가 조금씩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체험을 지나치게 쫓으면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 쉬워요. 반대로 체험을 전부 부정하는 것도 균형이 아니에요. 은사와 체험을 이해하는 방식은 교단마다 다를 수 있어요. 소속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말씀으로 점검해 보세요.

말씀 속에서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개역한글)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개역한글)

13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갈라디아서 5:22-23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요즘 조금이라도 자란 것 하나를 찾아 감사해 보세요.

짧은 기도

성령님, 날마다 제 안에서 주님의 열매가 자라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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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 자라고 싶은데

순종이 두려워요. 안 하면 벌 받을까 봐 하게 돼요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은 복종에 가깝고,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 순종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겁주려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르시는 아버지예요. 순종은 벌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에요.

순종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에서 시작돼요.

어릴 적 경험이나 교회에서 받은 인상 때문에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느끼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 순종도 "안 하면 큰일 난다"는 압박이 돼요. 하지만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내 경험이나 감정으로 하나님을 정의하지 말고, 성경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보세요. 예수님은 아버지를 "내가 아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셨어요. 탕자를 기다리다 달려가 안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 증거예요.

순종이 무겁게 느껴질 때는 해야 할 일을 늘리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한 번 더 바라보세요. 사랑받는 자리에서 하는 순종은 짐이 아니라 응답이 돼요.

말씀 속에서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개역한글)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개역한글)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눅 15:11-24를 천천히 읽고, 아버지의 행동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을 한 줄로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아버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순종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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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상처, 봉사, 교회 고르기, 이단과 정치까지.

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교회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나가기가 싫어요

교회 안의 상처는 더 아프게 느껴져요. 교회도 부족한 사람들의 공동체라서 상처가 생겨요. 상처를 숨기지 말고, 안전한 사람에게 말하고, 시간을 두고 회복하세요. 사람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는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하나님까지 잃지 않도록 천천히 회복하세요.

교회는 완성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들이 서로 배우는 곳이에요. 그래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요. 상처를 받았다면 그 아픔은 실제이고, 참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상처를 다루는 방법

먼저 안전한 사람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세요. 직접 만나 말해야 한다면 감정이 가라앉은 뒤 차분히 하세요. 폭력이나 권력 남용처럼 심각한 일은 개인이 참는 문제가 아니므로 교회 안의 책임 있는 사람이나 외부 기관의 도움을 구하세요.

잠시 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가 될 수 있어요. 다만 혼자 신앙을 지키기보다 다른 건강한 공동체를 찾아 다시 연결되길 권해요.

말씀 속에서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18 (개역한글)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태복음 18:15 (개역한글)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폭력, 성적 문제, 금전 착취, 심각한 정서적 학대는 용서나 인내의 이름으로 덮지 말고 도움을 청하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마음에 남은 상처를 편지로 적고(보내지 않아도 돼요), 이야기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정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상처를 숨기지 않게 하시고 천천히 회복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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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교회 봉사에 지쳤어요. 멈추면 안 되나요?

봉사가 은혜가 아니라 짐이 되었다면 잠시 멈추고 점검하세요. 교회는 일을 위해 만든 곳이기 전에 사랑을 나누는 곳이에요. 쉬는 것은 직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섬기기 위한 지혜예요.

섬김은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해요. 짐이 되었다면 멈추고 돌아보세요.

체면이나 직분 때문에 무리하게 사역을 이어 가다 보면 기쁨도 열매도 없는 습관이 되어 버려요. 마르다가 많은 일로 분주했을 때 예수님은 일을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분주함에 빼앗긴 것을 보셨어요.

멈추고 점검하기

지금 하는 일의 이유를 물어보세요. "사랑해서"인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인지 살펴보세요. 일의 양이 과하다면 줄이거나 나누도록 말해 보세요. 쉬는 동안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으로 회복을 시작하세요.

예수님도 사람들을 섬기신 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기도하셨어요.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맞추는 시간이에요.

말씀 속에서

38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8-42 (개역한글)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개역한글)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1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맡은 봉사를 적고, 줄이거나 나눌 수 있는 것 하나를 정해 담당자와 이야기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일 때문에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기쁨으로 섬기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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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어느 교회에 다녀야 할까요? 좋은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큰 교회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기준이 아니에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공동체인지, 돈과 권력이 투명한지를 보세요. 완벽한 교회는 없지만 방향이 건강한 교회는 있어요.

크기보다 방향을 보세요. 말씀, 사랑, 투명함이 기준이에요.

교회를 고를 때는 건물, 프로그램, 거리 같은 조건이 먼저 눈에 들어와요. 이런 조건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아니에요. 예수님은 제자의 표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셨어요.

살펴볼 만한 것

말씀이 성경에 근거해 전해지는지,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 존중하는지, 재정이 투명한지, 질문과 의견이 환영받는지를 보세요. 새 신자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중요한 단서예요. 한두 번의 방문으로 판단하지 말고 몇 번 예배와 모임에 참여해 보세요.

완벽한 교회를 찾느라 계속 떠돌기보다, 건강한 방향의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함께 성장하는 쪽이 신앙에 도움이 돼요.

말씀 속에서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개역한글)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2-47 (개역한글)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5-1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교회를 고르는 기준 세 가지를 적고, 가 본 교회를 그 기준으로 가볍게 돌아봐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가 뿌리내리고 함께 자랄 건강한 공동체를 만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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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꼭 교회에 다니고 공동체 활동을 해야 하나요? 혼자가 편해요

혼자 신앙생활이 편한 것은 이해돼요. 하지만 성경의 믿음은 처음부터 공동체 안에서 자라도록 그려져 있어요. 사람 때문에 힘들 수 있지만, 서로 격려하고 함께 예배하는 힘은 혼자서는 얻기 어려워요.

혼자는 편하지만, 함께일 때 더 멀리 가요.

사람에게 상처받았거나 시간이 부족해서 혼자 신앙을 지키고 싶은 분이 늘고 있어요. 혼자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은 소중해요. 다만 서로의 부족을 채우고 함께 예배하는 경험은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나요.

부담 없이 시작하기

처음부터 많은 모임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주일 예배 하나와 소그룹 하나만 시작해 보세요. 모임이 점검이나 감시처럼 느껴지면 질문해도 괜찮고, 다른 소그룹을 찾아도 괜찮아요.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버리고 서로 격려하라고 해요. 이것은 의무를 강요하기보다 서로를 돌보라는 초대예요.

말씀 속에서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25 (개역한글)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도서 4:9-10 (개역한글)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에 안전하다고 느끼는 신앙의 사람 한 명에게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사람 사이에서 다시 서로를 세워 주는 공동체를 만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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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이단과 사이비는 어떻게 분별하나요?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 특정 사람을 하나님처럼 따르게 하는지, 돈과 가정과 일상을 통제하는지를 보세요.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 거리를 두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혜예요.

성경이 기준인지, 사람이 기준인지가 첫 번째 질문이에요.

이단과 사이비는 처음에 친절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답을 주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마음이 힘들 때 쉽게 끌려가요. 겉모습이 아니라 열매로 분별하라는 말씀이 도움이 돼요.

주의 신호

특정 인물을 절대적으로 따르게 해요. 성경 해석을 독점하고 질문을 금지해요.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를 끊게 해요. 헌금이나 노동, 개인 정보를 과하게 요구해요. 이런 신호가 보이면 서둘러 결정하지 말고 믿을 만한 목회자나 가족과 상의하세요.

평소에 성경을 스스로 읽고 있으면 이상한 해석을 구별하는 눈이 생겨요. 듣는 말씀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에 비추어 확인하는 습관이 가장 좋은 예방이에요.

말씀 속에서

11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개역한글)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7:15-16 (개역한글)

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일서 4:1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이미 깊이 관여했거나 가족이 빠졌다면 혼자 싸우지 말고 교단 이단상담소나 전문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으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다니거나 만나는 모임에 대해 위 주의 신호 네 가지를 하나씩 점검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성경으로 분별하게 하시고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따르는 대신 주님만 따르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

성도가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다만 예배와 설교가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주장으로 채워지면 복음보다 정치가 앞서게 돼요. 교회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자리여야 해요.

복음이 정치보다 앞서야 해요. 의견은 달라도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요.

정치적 이슈는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져요. 그러나 교회에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함께 앉아 있어요. 설교가 한 가지 정치적 결론을 강요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이 아니라 정치를 들은 느낌을 받아요.

균형 잡기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정의, 약자 돌봄, 생명 존중 같은 원칙은 교회가 말해야 해요. 다만 구체적인 정당이나 후보 지지는 개인의 판단 영역으로 존중하는 것이 좋아요.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지 않고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 대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예수님은 어느 정치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셨고, 모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교회가 하나 되어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에 주는 증거예요.

말씀 속에서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개역한글)

21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태복음 22:21 (개역한글)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정치 의견이 다른 신앙의 사람 한 명을 떠올리고, 그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한 번 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의견이 달라도 형제자매로 사랑하고 함께 예배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교회 안에서 생기는 일

주일에 일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주일에 일하는 것이 곧 죄는 아니에요. 안식일의 뜻은 규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쉼과 사랑과 생명을 지키는 데 있어요. 근무 때문에 주일 예배를 드리기 어렵다면 다른 시간의 예배, 온라인 예배, 개인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아보세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선물이에요. 죄책감이 아니라 쉼과 예배를 구하세요.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며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어요. 안식일은 규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날이에요. 응급, 돌봄,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분이 계신 현실도 있어요.

현실에서 방법 찾기

가능하면 근무 일정에서 예배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어렵다면 다른 날 쉼을 정해 안식을 지키세요. 온라인이나 평일 예배, 짧은 개인 예배도 소중해요. 중요한 것은 규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키는 마음이에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면, 주일을 예배와 쉼, 가족과의 시간으로 지키려는 노력도 좋아요. 다만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같은 마음이에요.

말씀 속에서

27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7-28 (개역한글)

1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2:11-12 (개역한글)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애굽기 20:8-10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 중 쉼과 예배를 위한 시간 두 시간을 미리 잡고, 일정표에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규정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가정·결혼·일터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을 어떻게 살아낼까요.

가정·결혼·일터에서

교회 다닌다고 가족과 갈등이 생겨요

신앙 때문에 가족과 부딪히는 일은 흔해요. 말로 설득하려 할수록 마음이 닫히기 쉬워요. 먼저 가족이 나의 변화를 사랑으로 느낄 수 있게 하고, 신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삶으로 보여 주는 쪽이 오래가요.

설득보다 삶으로, 강요보다 사랑으로 보여 주세요.

신앙을 가진 뒤 가족과 가치관이 달라지면 서로 서운해져요. 가족은 "나를 버린다"고 느끼기도 하고, 나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어느 한쪽만 잘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갈등을 줄이는 방법

가족과의 약속과 역할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빠지는 모습이 오히려 거부감을 키워요. 질문을 받으면 짧고 부드럽게 대답하세요. 시댁이나 부모님의 신앙 방식이 다를 때는 직접 부딪히기보다 "감사해요, 제가 생각해 볼게요" 정도로 받으며 거리를 조절하세요.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가족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 주는 것이에요.

말씀 속에서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베드로전서 3:1-2 (개역한글)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18 (개역한글)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폭력이나 심한 통제가 있다면 인내만 권하지 않아요. 안전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에 가족 한 명에게 신앙 이야기가 아닌 안부와 고마움을 먼저 전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가 사랑으로 가족 곁에 있게 하시고 때가 되면 주님이 일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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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결혼·일터에서

부모님을 용서하기가 어려워요

용서는 상처가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픔을 인정하고, 복수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며, 시간을 두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에요. 부모님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는 시선이 이해를 돕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용서는 한 번에 끝나는 결심이 아니라, 조금씩 내려놓는 여정이에요.

부모님과의 관계가 아팠다면 "공경하라"는 말씀이 무겁게 느껴져요. 성경의 용서는 상처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그 상처가 나를 계속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에요.

용서의 걸음

첫째, 있었던 일과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세요. 둘째, 안전한 사람이나 상담자에게 이야기하세요. 셋째, 갚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세요. 넷째, 관계를 어디까지 회복할지는 안전과 현실을 고려해서 천천히 정하세요. 용서와 관계 회복은 같은 말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수록 부모에게 받으려던 것에 대한 갈증이 줄어요. 그때 비로소 부모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돼요.

말씀 속에서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1-32 (개역한글)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마태복음 18:21-22 (개역한글)

13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로새서 3:13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학대나 폭력의 상처는 전문 상담의 도움과 안전한 거리두기가 필요해요. 용서는 다시 위험한 관계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에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부모님에 대한 감정을 편지로 써 보고(보내지 않아도 돼요), 마지막에 하나님께 맡기는 문장을 덧붙여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 아픔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내려놓을 힘을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가정·결혼·일터에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자녀,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존재예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잔소리와 통제보다 먼저 아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믿음은 강요가 아니라 부모의 삶으로 보여 주세요.

아이를 바꾸기 전에, 아이 곁에 먼저 앉아 주세요.

자녀가 교회를 싫어하거나 공부와 진로에서 부모의 기대와 다르게 갈 때 부모의 마음이 무너져요. 이때 걱정이 앞서서 다그치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고 압박으로 느끼기 쉬워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

먼저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세요. 해결책보다 공감이 먼저예요. 아이가 바닥을 치는 것 같은 시기에도 억지로 끌어올리려 하지 말고 함께 있으면서 기다려 주세요. 신앙은 질문할 수 있는 안전한 분위기에서 자라요.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시듯 자녀도 기다리면 변해요. 기다림은 포기가 아니라 사랑의 한 모양이에요.

말씀 속에서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개역한글)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개역한글)

21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로새서 3:21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아이와 10분, 훈계나 질문 없이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 뜻을 내려놓고 아이를 주님이 맡기신 존재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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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결혼·일터에서

배우자와 계속 부딪혀요.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바꾸려는 잔소리는 대개 관계를 더 멀게 해요. 판단을 잠시 멈추고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의 말을 선택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에요. 필요하면 부부 상담의 도움도 받으세요.

바꾸려 할수록 멀어지고, 받아들일수록 가까워져요.

연애할 때는 서로의 다름이 매력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같은 다름이 갈등이 돼요. 사랑이 식어서일 수도 있고, 서로 기대가 달라서일 수도 있어요. 먼저 내가 어떤 부분에서 지쳐 있는지 정직하게 보는 것이 좋아요.

회복을 위한 작은 행동

하루 한 번 고마운 점을 말로 표현해 보세요. 불만은 비난이 아니라 "나는 이럴 때 힘들어"로 말하세요. 감정이 격해지면 잠깐 멈추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세요. 서로의 다름을 고쳐야 할 점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점으로 보려고 해 보세요.

내 힘으로 사랑하기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사랑을 구하세요. 사랑의 샘이 마르지 않으신 분께 받아서 나누는 길이 있어요.

말씀 속에서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 4:2 (개역한글)

19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 3:19 (개역한글)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폭력, 외도, 지속적인 통제가 있는 경우에는 혼자 견디지 말고 전문 상담이나 도움을 받으세요. 안전이 먼저예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오늘 배우자에게 고마운 점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제 안의 사랑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배우자를 대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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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결혼·일터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요?

성경은 믿음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일에 신중하라고 해요. 신앙이 다르면 가치관, 자녀 양육, 주일 시간, 헌금 같은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이 생겨요. 사랑이 있다면 더 현실적으로, 기도하며 충분히 대화해야 해요.

사랑만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향하는지도 함께 보세요.

결혼은 두 사람의 감정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함께 가는 일이에요. 신앙이 다르면 시간 사용, 돈, 자녀 교육, 가족 행사에서 반복해서 부딪혀요. 이는 선교지에 가는 것만큼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을 알고 시작해야 해요.

결정 전에 나눌 대화

신앙을 어떻게 존중할지, 자녀 신앙 교육은 어떻게 할지, 예배 시간과 헌금은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세요. 상대가 신앙에 대해 열린 마음인지, 아니면 내 신앙을 줄이길 기대하는지도 살펴보세요. 믿음의 선배와 함께 상담해 보세요.

교회에 이성이 적어 속상할 수 있지만, 조급함에 결정하기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나 자신의 삶을 충실히 가꾸세요.

말씀 속에서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린도후서 6:14 (개역한글)

12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린도전서 7:12-14 (개역한글)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와 나눠야 할 신앙 관련 질문 다섯 가지를 먼저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주님이 이끄시는 길을 분별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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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결혼·일터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을 섬길수록 만만하게 보여요

친절과 섬김은 필요해요.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거나 나를 소진시키는 도움까지 계속 주는 것은 건강하지 않아요. 선한 동기를 점검하고, 거절할 것은 정중히 거절하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을 일터에 적용해 보세요.

섬김에도 지혜가 필요해요. 경계가 있는 친절이 오래가요.

직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삶의 자리지만, 그곳은 일과 성과가 중요한 곳이기도 해요. 내가 도움을 주면서 속으로 "알아주겠지" 하고 기대했다면 동기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상대를 내 방식대로 바꾸려는 마음이 섞이면 지치고 서운해져요.

지혜로운 섬김

도움을 요청받았을 때 지금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 일인지 먼저 생각하세요. 못 하는 일은 이유를 짧게 말하고 거절하세요. 일은 정확하게 하고 약속은 지키세요. 신앙 이야기를 무리하게 꺼내기보다 성실함과 정직으로 먼저 신뢰를 쌓으세요.

관계가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기도하다 보면 상대보다 내 마음이 먼저 보이고, 때로 관계가 풀리는 경험을 하게 돼요.

말씀 속에서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개역한글)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개역한글)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18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 거절해야 할 부탁이 오면 "이번에는 어렵겠어요, 다음에 도울게요"처럼 한 문장을 미리 준비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일터에서 지혜롭고 성실하게,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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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세상 사이에서

돈 걱정, 헌금, 투자, 점, 그리고 복에 대한 질문이에요.

돈과 세상 사이에서

돈 걱정이 떠나질 않아요

돈 걱정은 현실이고, 걱정하는 마음을 믿음 없다고 나무랄 필요는 없어요. 다만 돈이 많아지면 불안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가지 않아요. 계획과 절제는 하되, 내 안전의 근거를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연습을 하세요.

돈을 소홀히 하지 않되, 돈에 붙잡히지 않는 길을 찾아요.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적으면 불안하지만, 많다고 평안한 것은 아니에요. 큰 재산을 가진 사람도 큰 걱정을 해요. 예수님은 먹고사는 걱정을 모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말씀하셨어요.

현실적으로 해 볼 일

수입과 지출을 한 번 정직하게 적어 보세요. 줄일 수 있는 지출 하나, 늘릴 수 있는 수입의 가능성 하나를 찾으세요. 그리고 나눌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를 정해 보세요. 나눔은 돈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에요.

부족한 듯해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큰 자유예요. 바울은 풍부하든 궁핍하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어요.

말씀 속에서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개역한글)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개역한글)

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3:5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빚이나 생활고가 심하다면 복지·금융 상담 같은 현실의 도움도 함께 받으세요.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달 수입·지출을 한 장으로 적고, 줄일 것 하나와 나눌 것 하나를 정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를 믿고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지혜롭게 살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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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세상 사이에서

돈이 없어서 헌금을 못 하면 믿음이 부족한 건가요?

헌금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하나님은 억지로나 부담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기쁨으로 드리는 마음을 보세요. 형편이 어려울 때는 있는 만큼, 혹은 시간과 섬김으로 드려도 괜찮아요.

액수가 아니라 기쁨과 정직함이 중요해요.

헌금이 부담이 되어 교회 가기가 불편해지는 분이 있어요. 성경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고, 많이 드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드린 사람을 보셨어요. 헌금은 믿음의 크기를 재는 시험이 아니에요.

부담이 될 때

형편에 맞게 정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아도 돼요.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거나 액수를 공개적으로 비교한다면 건강한 방향이 아니에요. 재정이 어떻게 쓰이는지 투명하게 공개되는지도 살펴보세요.

나누는 방식은 돈만이 아니에요. 시간, 재능, 따뜻한 말, 기도도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드림이에요.

말씀 속에서

7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개역한글)

41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마가복음 12:41-44 (개역한글)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12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주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을 돈 말고도 한 가지 더 적어 보세요(시간, 도움, 기도).

짧은 기도

주님,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드리는 마음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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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세상 사이에서

돈을 많이 벌고 모으는 건 죄인가요?

재물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에요.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거기에 묶이는 것이에요. 재물은 쌓아 두기보다 흘려보낼 때 건강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어요.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가예요.

성경에는 재물이 많았던 믿음의 사람들도 나와요. 예수님은 재물 있는 사람들의 섬김을 받기도 하셨어요. 반면 부자 청년은 재물에 묶여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어요. 기준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재물이 나를 쥐고 있느냐예요.

점검 질문

돈을 쓰거나 벌 때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는지, 돈 때문에 사람이나 시간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세요. 일정 부분을 정해 두고 나누는 습관이 재물에 묶이지 않게 도와요.

잘 벌고 정직하게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에요. 그것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나눔에 쓰는 것이 청지기의 모습이에요.

말씀 속에서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16-21 (개역한글)

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17-19 (개역한글)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이번 달 나눔이나 후원할 곳 하나를 정해 금액까지 정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재물을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지혜롭게 쓰고 나누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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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세상 사이에서

코인·주식에 빠진 가족,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는 탐심과 연결되기 쉽고, 한 번 손실이 나면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지기도 해요. 비난으로 막기보다 손실과 위험을 함께 점검하고, 필요하면 전문 상담이나 도박중독 상담의 도움을 받으세요.

비난보다 점검과 동행이 먼저예요. 가족이 함께 지켜야 할 문제예요.

투자는 그 자체로 죄가 아니에요. 다만 빚을 내어 하는 투자나 하루 종일 시세를 보게 되는 상태는 위험 신호예요. 성경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올무와 해로운 욕심에 빠진다고 경고해요.

가족이 할 수 있는 일

먼저 감정을 누르고 현재 투자 규모와 빚 여부를 차분히 확인하세요. 한도를 정하고 번 돈이 아니라 잃어도 되는 돈의 범위로 제한하자고 제안해 보세요. 비난은 숨기는 행동을 키워요. 필요하면 도박중독 예방 상담(1336) 같은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으세요.

가족 전체가 함께 기도하는 것도 큰 힘이 돼요. 다만 기도가 현실의 도움을 대체하지는 않아요.

말씀 속에서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9-10 (개역한글)

11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13:11 (개역한글)

5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언 21:5 (개역한글)

함께 기억할 것

빚이 커졌거나 일상이 무너졌다면 도박중독 상담전화 1336(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과 금융 상담을 활용하세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가족과 함께 투자 규모와 빚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보고, 한도를 정하는 대화를 시작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탐심에서 건져 주시고 가족이 정직하게 마주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돈과 세상 사이에서

점이나 타로, 한 번쯤 봐도 괜찮을까요?

불안한 마음에 가볍게 보는 사람이 많지만, 성경은 점술과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알려는 것을 분명히 경계해요. 불안한 마음을 이해하되, 그 불안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쪽이 평안으로 이어져요.

불안한 마음은 이해해요.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 보세요.

점이나 타로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에요. 재미로 가볍게 본다 해도 결과가 마음에 남아 선택에 영향을 주는 일이 많아요. 성경은 점술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로 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해요.

불안을 가져가는 곳

진로, 연애, 돈 같은 불안한 질문이 생기면 하나님께 먼저 말씀드리세요. 성경 말씀에서 지금의 질문과 연결되는 구절을 찾아 읽어 보세요. 믿을 만한 사람과 상담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다고 약속하셨어요. 그 약속을 붙들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믿음이에요.

말씀 속에서

10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신명기 18:10-12 (개역한글)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11 (개역한글)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가장 알고 싶은 미래의 질문을 적고, 그 아래에 "하나님께 맡기며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적어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알 수 없는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오늘을 걷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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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세상 사이에서

나도 야곱처럼 복 받고 잘 살고 싶은데, 욕심일까요?

복을 구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에요. 성경의 복은 편안함과 성공만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 복이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까지 포함해요. 내가 받은 복이 나만을 위한 것인지 함께 나누는 것인지가 물음이에요.

복은 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흘러가라고 주어진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어요. 복의 목적은 한 사람의 안락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이었어요. 야곱의 삶도 복을 얻으려는 욕심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고난 속에서 빚으셨어요.

성경이 말하는 복과 형통

예수님의 팔복은 가난한 마음, 애통, 온유 같은 것을 복이라고 해요. 요셉은 노예와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형통했다고 성경은 말해요. 즉 복과 형통의 핵심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에요.

복을 구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한 가지를 덧붙여 기도해 보세요. "이 복이 저를 통해 누구에게 흘러가게 해 주세요".

말씀 속에서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2-3 (개역한글)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0 (개역한글)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세기 39:2 (개역한글)

오늘 해 볼 한 가지

지금 내가 받은 복 하나를 적고, 그것을 누구와 나눌 수 있을지 한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짧은 기도

주님, 복을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해 주세요.

이어서 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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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주제는 더메시지랩 The Message LAB 〈[신앙Q&A] 답답함에 답하다〉 재생목록과 보내 주신 원고를 참고했어요. 글은 3s3k가 새로 정리했고, 성경 본문은 개역한글에서 가져옵니다. 재생목록에서 영상으로 더 듣기